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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취재기: 전쟁터가 한눈에 들어온 ‘안전한’ 언덕

취재기자 :
김준억 연합뉴스 이스탄불 특파원
등록일 :
2014-12-01
조회수 :
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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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취재기: 전쟁터가 한눈에 들어온 ‘안전한’ 언덕

 

김준억 연합뉴스 이스탄불 특파원

 

 그곳은 전쟁터였을까. 코바니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키 샨르우르파 주(州) 수루치 군(郡) 뮤르시트프나르 마을 언덕에 올라 전투기가 남긴 비행운과 검게 치솟는 연기를 보고 폭발음과 기관총 소리도 들었지만 이런 의문은 지울 수 없었다.

 현장을 취재한 때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북부 소도시 코바니(공식 지명 아인알아랍)를 공격해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비대(YPG)’와 격전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10월 9일이었다.

 IS가 공격한 초기 주재지인 이스탄불에서 현지 언론과 외신, 모니터그룹 시리아인권관측소(SOHR) 등을 참고해 기사를 쓰다 보니 현장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코바니에 쏠린 국제 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곧 IS에 함락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와 더 늦기 전에 현장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본사에 출장을 신청했다. 한국 언론사의 유일한 터키특파원으로서 터키 국경지역에서 일어난 세계적 뉴스를 현지 언론과 외신에만 의존해 국내에 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AP, AFP, 로이터 등 글로벌 통신사들은 뮤르시트프나르발로 코바니 전황을 전하는 기사들마다 ‘터키 쪽 국경지역에 있는 자사 기자도 포연을 목격하고 폭발음과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느낌을 주는 문장을 바이라인처럼 넣고 있었다.

 기자라면 응당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취재장비와 함께 방탄조끼와 방탄헬멧을 가방에 담는 순간부터 조금씩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쟁을 취재한 경험이 없었기에 현장이 어떨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현지 언론과 외신이 전하는 영상과 사진, 기사 등으로 접한 코바니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코바니와 붙어 있는 뮤르시트프나르는 IS가 쏜 박격포가 국경을 넘어와 이미 사상자가 여럿 발생했던 곳이라 더욱 긴장됐다.

 그러나 정작 코바니에서 1㎞ 정도 떨어진 뮤르시트프나르의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긴장은 한순간에 풀렸다. 언덕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코바니 도심에서는 시가전으로 끊임없이 포연이 치솟고 폭격 소리가 들려왔지만 언덕 위는 너무나 평온했다. 사각형 모양인 코바니의 북쪽 면인 터키 국경선만 제외하고 나머지 3면에 전선이 형성됐기에 북쪽 가운데 있는 이 언덕은 박격포 사거리 밖이었다. 사람이 폭탄과 총에 맞는 모습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전쟁터를 맨눈으로 보는 동안 거대한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언덕 위에 있던 서른 명 남짓한 각국 취재진은 속칭 ‘뻗치기’에 지친 듯 보였다. 남쪽으로 향한 카메라를 장착한 삼각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지만 몇몇은 뷰파인더 대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영어를 쓰던 한 기자는 데스크가 걸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통화에서 “오늘 상황도 어제와 다를 게 없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이 언덕에는 코바니에서 피란 온 주민과 수루치 주민 등 20여 명도 함께 있었다. 코바니와 수루치는 같은 도시나 마찬가지로 두 곳 주민 대부분이 쿠르드족이었다. 하염없이 코바니를 쳐다보던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 스데롯 언덕을 떠오르게 했다. 지난 7월 가자지구가 내려다보이는 스데롯 언덕에 의자를 갖다놓고 맥주를 마시며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불꽃놀이처럼 즐기던 이스라엘인들과 달리 쿠르드인들은 흙먼지 날리는 언덕에 쭈그려 앉았고, 이들은 생수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취재한 지 1시간 지났을 즈음 하늘 멀리서 전투기 소리가 들려오자 언덕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커다란 폭발음에 이어 검은 연기가 도심을 뒤덮자 박수와 환호성, 카메라 셔터 음이 섞였다. 미국이 주도한 국제동맹국이 IS를 공습한 것이다. 스데롯 언덕에선 팔레스타인인의 죽음에 축배를 들었지만 이 언덕의 쿠르드인은 고향 땅 공습에 환호를 보냈다.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었고, 하늘에 그려진 흰 비행운을 향해 ‘오바마’를 연호하기도 했다.

 포연이 옅어지면서 언덕은 다시 평온해졌다. 기자들은 터키 빵 ‘시미트’를 켜켜이 담은 쟁반을 머리에 얹고 언덕에 오른 청년에게 1리라(485원) 동전을 건네고 빵 한 개를 사서 허기를 채웠고, 쿠르드인들은 다시 흙바닥에 앉았다.

 언덕 바로 옆에 터키군 탱크 십수 대가 배치됐지만 아무런 긴장을 느낄 수 없었다. 현장에 가기 전 접한 사진과 영상에서 코바니로 포신을 향한 탱크들이 언제라도 발포할 것처럼 보인 것과 딴판이었다. 군인들은 느릿느릿 걸었고, 탱크 6대의 포신은 코바니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이처럼 ‘안전한’ 전쟁터 취재는 불편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시리아도 담당이라 1년 반 넘도록 쓴 수많은 내전 기사의 소스는 전부 인터넷에서 얻은 것이었다. 외국 기자가 시리아에 들어가서 취재하려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 외신들도 현지 활동가들의 보고를 토대로 내전 소식을 전하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를 인용하거나 현지 활동가와 스카이프로 통화해 사실을 확인하는 게 전부다. 활동가들이 인터넷에 올린 영상과 사진의 진위를 가려낼 방법도 없다. 

 그러나 코바니는 달랐다. 외신들은 매우 안전하게 시리아 내전을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뮤르시트프나르발 기사와 사진, 영상을 연일 대거 쏟아냈다. 이로써 시리아 내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코바니에 집중됐다. 하지만 격렬한 시가전, 미국 주도의 공습 등을 전하는 외신 기사들은 한동안 날짜만 달랐을 뿐 내용은 같았다. 사진과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코바니는 늘 검은 포연이 휩싸고 있었다.

 도심 면적이 4㎢ 정도인 코바니는 서방 언론의 집중적 보도로 시리아 내전과 IS 격퇴의 상징이 됐고, 아인알아랍이란 공식 지명보다 쿠르드식 명칭인 코바니로 불리게 됐다. 서방 언론들은 IS가 과거 시리아의 여러 도시를 장악할 당시 코바니처럼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기사량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또 IS가 코바니를 공격하는 동안 시리아 정부군이 이른바 ‘통폭탄’ 공격을 부쩍 늘려 민간인이 대거 숨졌지만 외신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을 보도하는 것이 진위 식별이 어려운 주장을 전하는 것보다 나은가’란 자문을 불러왔다. 영국 스카이뉴스의 셰린 타드로스 중동특파원도 코바니 보도로 묻힌 정부군의 잔혹상 등을 거론하면서 이 언덕을 ‘수치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물론 극악한 IS에 함락당할 위기에 놓인 코바니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지적에 일부 공감했다.

 전장이 아닌 것 같은 전쟁터 취재를 마치고 코바니 난민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외국 기자임을 한눈에 알아본 난민들은 앞다퉈 자신들의 불만을 쏟아냈다. 이들은 터키가 방관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쿠르드 청년들이 싸우려 코바니로 가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난민들의 주장은 이미 외신을 통해 접했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터키군 몰래 코바니를 다녀온다고 말하는 쿠르드 청년도 여럿 만났다. 취재에 동행한 쿠르드어 통역을 맡은 터키인은 어디선가 알아 왔는데 코바니로 갈 수 있다며 함께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터키군의 방해로 쿠르드족 전사들이 코바니로 가지 못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해 보였다.

 출장을 마치고 이스탄불로 돌아온 날 스타판 데 미스투라 유엔 시리아 특사가 코바니에 있는 민간인 1만 2천 명이 대학살될 위험에 놓였다며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 전사들이 시리아에 가서 싸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터키 정부는 코바니에 민간인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코바니 관리는 민간인이 2천 명 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지만 미스투라 특사가 경고한 ‘1만 2천 명 대학살’ 위험과는 모두 거리가 멀었다.

 터키는 공식적으로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가는 것을 금지했고 쿠르드 청년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프로파간다 차원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뮤르시트프나르로 가는 첫 이동인 이스탄불발 가지안테프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청년은 터키의 쿠르드족 반군인 ‘쿠르드노동자당(PKK)’ 조직원으로 코바니로 가는 길이었다. 수단에서 일하다 이날 이스탄불로 날아왔다는 청년은 서툰 영어로 코바니로 간다고 말했다. 국경이 폐쇄돼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그는 씩 웃으면서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코바니는 위험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PKK’라고 속삭였다. 가지안테프의 공항버스에 오르던 그 청년이 국경을 넘는 것에 성공해 IS와 싸우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