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상 선생 10주기 추념사(2024.2.2.)
정신영기금회관
김진현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전 문화일보 회장·전 과학기술처장관
관훈클럽 15대 총무, 관훈클럽정신영기금 5대 이사장
박권상 선배님, 리버럴리스트 큰 선배님.
우리들 곁을 떠나신지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이승의 고생을 벗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기를 빌었던 저의 후배들로서 10년 추모의 자리에 서니 새삼 그리고 더욱 박 선배의 Liberalist로서의 이상과 그리고 현생에서 부닥친 치열했던 삶을 그리게 됩니다. 특히 박 선배에 이끌려 관훈클럽 총무와 니만 펠로가 되고, 동아일보사에서까지 언론계 대부분 박 선배 뒤를 따랐던 저로서는 그러합니다.
박 선배님은 언론의 가장 낮은 자리 일선기자에서부터 편집국장, 논설주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언론기관 KBS 최고 CEO까지 이른 현실의 언론인이었고, 따라서 각박하고 번다한 언론 현실을 뚫고 가야 하는 현실 행동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대 대한민국 최고 논객이었으며 이론과 행동에서 가장 앞장선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제가 1967년 31살의 가장 꼬맹이로 동아일보 논설실에 갔을 때 천관우주필, 홍승면선배, 서울대 황산덕, 고려대 오병헌교수, 소설가 김성한 씨 등 쟁쟁한 명사들이 포진 했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논설회의에서나 회의 끝난 뒤 논설실 객담에서나 좌중을 휘어잡는 이는 박 선배였습니다.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런 탁월한 리더쉽 능력에다 일찍 미국 연수와 학구적인 이상주의가 배합하며 관훈클럽 창립, 신문의 날 제정, 한국언론의 국제화, 독재정권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 일관 지속된 언론 자유수호에 앞장선 선구적 리버럴리스트였습니다. 박선배가 선 땅의 현실이 요구하는 일상의 현재적 요구와 박 선배의 리버럴리스트로서의 이상주의는 도리없이 박선배의 생애를 ‘치열’하게 만들었습니다.
박 선배님과 6살 아래인 저를 포함한 다생(多生) 세대인 우리 세대가 한국 바탕에서 리버럴리스트로 산다는 것은 여유 부릴 수 없는 치열한 삶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니혼 또는 닛뽄이라는 일본제국 아래 국민학교, 중학교 다니고, 이어서 미군정이라는 USA 통치하에 3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만 만 2년도 못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3개월, 그리고 대한민국- 4개의 국가체제, 한문 일어(가타카나) 한글 영어까지 네 문자를 익히며 사는 다언어 다문자 다생세대였습니다. 치열함과 절실함의 삶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 리버럴리스트 이상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헛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송의달 국장의 저서 <아웃포머의 힘>이 명시했듯이 ‘세계적 언론인’을 꼽는데 한국에서는 단 한 사람 박권상 선배를 대표적 세계적 수준의 인물로 꼽았습니다. 조선일보에도 선우휘, 최석채 씨같은 명 언론인이 있었습니다.
지난 1월 26일 마석묘지에서 일민 김상만 회장 30주기 추념식이 있었습니다. 박 선배는 그 엄혹한 시절 일민과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혼신의 정열을 바치셨습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또 나름 참여했던 저로서도 현실에서는 끝내 좌절로 돌아오고, 박 선배나 저나 동아에서 같이 쫓겨나 동아에서 이루지 못한 꿈, 선배님 꿈을 회상하며 오래오래 일민 묘 앞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박 선배님은 Liberalist라 영어로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자 진보개혁주의자라는 뜻이 같이 담긴 이 말을 지금 이 땅에서 정확히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짜 자유주의자, 가짜 진보좌파가 지배적이어서 인류보편윤리로서의 휴머니즘의 진보와 자유시민 민주정치 시장자유 원칙을 지지하는 두 가지 의미가 겹친 Liberalist는 우리말로 옮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상주의는 필경 진보적일 수밖에 없고 언론의 이상을 쫓는 자는 자유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 선배가 얼마나 확실한 Liberalist인가를 증언코자합니다. 2000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청으로 대한민국 신문·방송사장단이 방문했을 때, 박 선배께서 아주 공개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북한 당국자에게 나치나 KGB 같은 언론공작을 호통치셨습니다. 북한 유일한 정본(正本) 신문인 노동신문 지방면에는, 예를 들면 남한 경상북도 대구시 어느 동 김 아무개가 김일성의 뭣에 감격하며 무슨 모임을 했다거나, 전라남도 순천시 어느 동 장 아무개가 김정일 말씀을 따다 무슨 찬양을 했다는 등의 보도가 매일같이 세 꼭지씩 나왔습니다. 박 선배는 북한의 우리 안내책임자(얼마 후 남북대화 책임자가 되었다)에게 “이 놈아 이런 조작기사를 우리 남한 언론 대표들이 와있는 동안만이라도 내지 말아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대노했습니다. 이틀인가 안 나오더니 사흘째부터 또 나왔습니다. 아마 이런 일로 해서 박 선배는 끝내 남북언론인 공동합의문(2000.08.11.)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또 KBS 사장 시절 국방 장관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남한에 북한 파견 간첩, 공작원이 3만명 있다며 걱정하던 말씀이 생생합니다.
박 선배님.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최대 국난에 처해있습니다. 가히 내전, 테러리즘이 횡행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에선 대한민국 시민의 개인 재능요소(Indivisual Talent Element)가 한류로 나타나 단군 이래 처음으로 ‘대한민국적’인 것이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극단의 성공, 극단의 실패, 극단의 대전환이라는 3개의 절정을 맞고 있습니다.
박 선배님은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 체제에서 66년의 생을 거치셨고, 저는 76년의 생을 거치고 있습니다. 과연 24년 뒤 2048년, 건국 100년에 대한민국은 Liberalist가 주류되는 평화 통일, 인류 보편의 지구촌 중심국가로의 큰길을 갈 것인지, 100년을 못 견디고 파멸의 길로 끝낼것인지. 대만민국이 미래 중심의 큰길로 가려면 이제 언론계에 제2의 박권상, 제3의 박권상이 속출해야만 합니다.
하늘에 계신 박권상 선배님. 오늘의 대한민국을 내려다보시면 아마 편히 쉬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이승의 나라 걱정 야단치시느라 여전히 치열하실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에서 KBS에서 제2, 제3의 박권상이 나오고 박권상 Model이 한국언론의 자화상으로 정착되기를 다짐하자는 결의를 박 선배님께 바치며 추모사를 닫겠습니다.
박 선배님의 이상주의 리버럴리스트 생애를 지켜주시느라 고생하신 사모님과 박 선배의 무게를 의식, 무의식으로 체험하며 자라 늠름하게 성공한 자녀들에게 이승에서 다 못 주신 사랑을 하늘에서 듬뿍내려 주소서.
부디 평안하소서.